파편화-개인화.

포스트페미니즘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알려져있는지가 궁금해져서, 문득 위키피디어를 뒤져보았더니, 파편화-개인화와 결부지어서, 구조적 문제들에 대한 집중도를 하락시키고 자신감-능력을 담보할 수 있는 특정 계층에게만 적용되는 이야기라는 비판이 보였다.

사실, 포스트페미니즘에 영향을 준 데리다나 들뢰즈. 특히 들뢰즈의 영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최근의 사회적 구조가 점점 개인 혹은 집단을 파편화시켜서 각 단위간의 차이를 극대화 시키고, 연대를 힘들게 하는 것이 현실인 만큼, 저런 형태의 비판은 아마도, ‘차이’가 갖는 잠재적 위험성과 그에 대한 대비, 혹은 활용에 대한 몰이해에서 출발한 것이 아닌가 싶다.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정규직 노조의 반응만 보더라도 구조 혹은 권력의 작동방식은 소름끼칠 정도로 두렵고, 무섭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단일한 포지셔닝 혹은 자아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흔히 말하는 현대의 ‘개인’ 아니겠는가. 단순하게 해석되던 사회구조가 복잡해지고 다면화 되면서 ‘개인’이라는 것도 결국 맥락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고, 개인들이 모여서 구성되는 연대의 힘도 점점 약해진다. 이렇게 권력은 자신이 지배하고 있는 모든 것의 차이를 드러내고 권력화해서 관리하기 쉽게 진보하고 있다. 

이런 차이가 극명해지는 시절에는 자연스럽게 소통에 대한 비용이 증가하기 마련이다. 얼마전에 굉장히 불편하게 여길 수 밖에 없었던 모 집단과의 소통에서 느꼈던 것은, 구조주의적인 해석에 기반해서 모여있는 성의 견고함과 부질없음이었다. 그들이 시도했던 성의 해체는 잠시였던 모양이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조직화 될 수 없는 개체에 대한 그들의 배타성은 소름끼칠 정도였다.

서로의 차이에 대한 해석과 이해가 권력의 근본이 된다면 이는 마이크로 파시즘으로 이행되는 시작점이겠지만, 소통의 근간이 된다면 무너지지 않는 무형의 저항세력의 시작점이 될게다. 차이의 권력-기능을 무력화하고, 소통-가능성을 극대화하는 형태의 삶의 방식. 강자와 약자라는 말이 갖는 권력이란 포인트를 무색하게 만들 수 있는 그 어떤 것.

하지만, 우습게도 이러한 삶의 방식을 갖고 살아가기위해 세상이 허하는 여유는 그리 많지 않다. 아마도, 가장 훌륭한 ‘투쟁’은 ‘여유’의 확보를 위한 투쟁인 것은 아닐까나. 물러서지 않는 전선의 전진을 위한 보급선. ‘여유’